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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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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이야기

대구의 쉼터, 시민 중심의 도심공원입니다.

국채보상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많은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조성한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은 42,509㎡(12,858평)의 면적에 22.5t의 달구벌 대종, 종각, 시원스럽게 뿜어대는 분수, 화합의 광장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지하에 3층 규모의 동인지하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시민들의 주차 공간 확보를 돕고 있으며, 중앙도서관을 끼고 있습니다.

넓은 잔디광장과 주위로 천여그루의 수목이 심겨져 있으며, 벤치도 넉넉하게 마련되어 휴식을 즐기기에 적당합니다.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도심공원으로써, 겨울에는 공원 주변 곳곳의 루미나리에, 은하수 길을 통해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야경을 제공합니다.

국채보상운동

1907년 1월 30일(음력 1906년 12월 16일) 오전 경북도내 인사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 현 수창초등학교 뒤 대성사 자리)에서 특별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의 주요 의제는 대구 광문사의 문회(文會)를 대동광문회로 개칭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회의가 끝난 뒤,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1851∼1913)이 건의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국채가 현재 1,300만 원인데, 정부의 국고금으로는 갚을 수 없는 형편이라, 국채를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할 형편이다.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매월 1명당 20전씩 모은다면, 3개월 만에 국채를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다."고 하며 우리 국민의 힘으로 나라 빚을 갚자는 내용의 건의서였습니다.

서상돈이 건의서를 낭독하자, 참석한 회원들은 우레 같은 박수로 찬성하였습니다. 회원들은 의기 분발하여 즉시 모금할 것을 결의하고, 각 도에 이러한 취지를 알려 전국적인 모금운동으로 전개해나갈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광문사 사장이었던 김광제(金光濟)는 당장 실천하기로 하고, 자신의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버리고 3개월분의 담뱃값에 해당하는 60전과 추가로 10원을 보태어 10원 60전을 출연하였습니다. 서상돈도 그 자리에서 800원을 출연하였습니다. 당시 쌀 한 말의 가격이 약 1원 80전 정도였으니, 서상돈이 출연한 800원은 쌀 약 450말 정도에 해당되는 거금이었습니다. 다른 참석자들도 이에 호응하여 의연금을 출연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2천원이 모금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이 참여한 가운데 전개된 최초의 국민경제운동이었습니다. 이 국채보상운동은 일제하의 물산장려운동, 해방 후의 국산품 애용운동, 최근 IMF사태 이후의 금 모으기 운동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온 경제 살리기 운동의 서막으로서,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감동적인 국민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발의는 상인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한 푼 두 푼 성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운동의 주인공은 시장에 장보러 나온 농민들이며, 봇짐장수이며, 여염집에서 가락지를 가지고 나온 아낙네였습니다. 이처럼 전국적인 국민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이름 없는 수많은 민중들의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따라서 국채보상운동에 보내는 우리들의 찬사는 이들을 향한 것이어야 마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