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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기념중앙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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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이야기

대구의 쉼터, 시민 중심의 도심공원입니다.

1940년~1995년까지 중앙국민학교가 있던 자리에 1960년 2·28학생민주의거를 기념하여 2003년에 만든 공원입니다. 2.28의거에 이어서 3·15, 4·19 등 역사적인 아픔이 담긴 곳이지만 현재는 대구 시민들의 편안하고 쾌적한 휴식처가 되었으며, 대구 시내에 위치하여 많은 시민들이 찾는 휴식공간이며, 데이트 장소이기도 합니다. 시원함을 더해주는 분수와 나무그늘도 많아 시민들이 시원하게 쉬었다 가는 공원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2·28학생민주의거

2·28학생민주의거는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정권의 횡포와 부패, 실정이 절정을 이루고 국민들의 생활이“못살겠다 갈아보자”고 할만큼 빈곤과 불법적 인권유린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일어난 민주적 저항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자유당 정부는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을 했고 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맞아 부패·불의로 민심이 이반했음을 알고도 부정선거로 집권을 연장할 것을 기도했습니다. 그에 따라 온갖 악행을 자행하는 가운데 언론과 야당의 탄압은 말할 것도 없고 막걸리와 고무신으로 매표공작을 벌였는가 하면 심지어 여당 후보의 정치 집회 때는 대중을 강제 동원하면서 야당 후보의 연설회 때는 청중이 모이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투표장과 개표장에선 사전투표·대리투표·피아노표 등 부정투개표로 민의를 조작했습니다.

이같은 자유당의 장기 집권을 위한 부정 음모가 진행되면서 정부통령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 수성 천변에서 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張勉)박사의 선거 연설회가 계획되었습니다. 당시 국민들 사이엔 자유당 정권의 악정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소리 없는 여론이 전국을 메아리쳤고 대통령 선거엔 야당 후보인 조병옥 박사에 초점이 모였으나 불행하게도 조박사가 서거하는 바람에 부통령 후보인 장박사가 모든 여망을 걸머졌습니다. 이 때문에 일요일인 그날의 수성천변 유세는 대구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국의 이목이 집중돼 자유당 정권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선거의 패배를 예감한 자유당 정부는 이성을 잃고 고교생인 어린 학생들이 유세장으로 몰릴 것을 우려한 나머지 대구 시내 공립 고등학교에 일요 등교를 지시했고 학교 당국은 온갖 핑계로 일요 등교를 강행했습니다. 어린 학생들마저 정치도구로 희생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학교에 따라 갑자기 임시시험을 친다고 했고, 단체 영화 관람이나 토끼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등교를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자유당 정권의 간계를 간파한 학생들은 불의에 몸을 떨었고 그날 학교에 모인 학생들은 당국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이같은 자유당의 불의와 부정을 규탄하는 집회로 바꾸어 궐기했고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뛰쳐나왔습니다. 당시 인구가 밀집했던 중앙통을 거쳐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의 악행을 규탄했습니다. 숱한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고통을 받았고 교사들도 모진 책임추궁을 받았습니다.

엄벌을 계획했던 정부 당국은 국민들의 분노에 처벌을 완화했고 독재에 움츠렸던 언론도 마침내 2·28학생의거를 보도함으로써 전국의 학생들이 잇따라 궐기하고 시위에 나섰습니다. 당시 야당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고 어른들도 말 못했던 공포 분위기를 어린 학생들이 처음으로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학생들도 아버지와 형님들의 말 못하는 사정을 알았던 만큼 죽음을 각오하고 자유당 정권에 육탄으로 항거했던 것입니다. 건국 이후 관제 데모만 보아왔고 관제 데모에만 동원되어 왔던 학생들이 처음으로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의사표시를 한 것이며 대구 시민들도 도피 학생들을 숨겨주는 등 뜨거운 성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2·28의거는 광야를 태우는 한 알의 불씨가 되어 들불처럼 번져갔고 3.15 마산의거, 4.19 대학생시위, 4.26 이승만대통령 하야로 이어져 마침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이 나라 최초의 민권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했습니다. 2·28대구학생 민주의거는 가난과 독재, 불의와 부정에 항거한 대구 시민정신의 표출이었고 해방과 더불어 수입한 서양식 민주주의의 한국판을 선구한 사건이었습니다. 동양권에서는 최초로 민권에 의한 민주 성취를 이룩한 4.19는 대구의 어린 학생들이 지핀 위대하고 기적 같은 불씨에 의해 발화 되었다는 사실은 청사에 길이 간직돼야 하고 그 정신은 대구가 있는 한 보존돼야 할 것입니다.

특히 대구는 일제침략기에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켜 전 국민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했고 6.25전쟁 당시 마지막 보루로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였으며 2·28민주의거로 국가의 민주적 정통을 심는 선구적 역할을 해냈습니다.

2·28의거의 숭고한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21세기의 비약하는 대구를 창출하는 대구 사랑의 뜨거운 정신으로 승화 결집시켜 나가야 할 것이며, 자랑스런 대구인의 긍지로 삼아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길이 전승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와 번영은 2·28 의사들이 뿌린 희생의 씨앗을 우리가 피와 땀으로 가꾸어 온 소중한 열매인 것입니다.